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멜 표류기 (문단 편집) == 역사적 기록 == >제주 목사(濟州牧使) 이원진(李元鎭)이 치계(馳啓)하기를, >“배 한 척이 고을 남쪽에서 깨져 해안에 닿았기에 대정 현감(大靜縣監) 권극중(權克中)과 판관(判官) 노정(盧錠)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보게 하였더니,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배가 바다 가운데에서 뒤집혀 살아 남은 자는 38인이며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다릅니다. 배 안에는 약재(藥材)·녹피(鹿皮) 따위 물건을 많이 실었는데 목향(木香) 94포(包), 용뇌(龍腦) 4항(缸), 녹피 2만 7천이었습니다. 파란 눈에 코가 높고 노란 머리에 수염이 짧았는데, 혹 구레나룻은 깎고 콧수염을 남긴 자도 있었습니다. 그 옷은 길어서 넓적다리까지 내려오고 옷자락이 넷으로 갈라졌으며 옷깃 옆과 소매 밑에 다 이어 묶는 끈이 있었으며 바지는 주름이 잡혀 치마 같았습니다. [[일본어|왜어]](倭語)를 아는 자를 시켜 묻기를 ‘너희는 서양의 절리지단〔吉利是段〕[* [[크리스천]]을 일본어로 음차해 '키리시단'이 되었고, '키리시단'을 다시 우리말로 음역한 것이다.]인가?’하니, 다들 ‘야야(耶耶)’[* [[네덜란드어]]에서 '예', '그렇다'를 뜻하는 'Ja'(야)라고 한 것을 그대로 받아적은 것으로 보인다.]하였고, 우리 나라를 가리켜 물으니 [[코리아|고려]](高麗)라 하고, 본도(本島: 제주도)를 가리켜 물으니 오질도(吾叱島)라 하고, [[중원]](中原)을 가리켜 물으니 혹 [[명나라|대명]](大明)이라고도 하고 대방(大邦)이라고도 하였으며, 서북(西北)을 가리켜 물으니 달단(韃靼: 타타르)이라 하고, 정동(正東)을 가리켜 물으니 일본(日本)이라고도 하고 [[나가사키|낭가삭기(郞可朔其)]]라고도 하였는데, 이어서 가려는 곳을 물으니 낭가삭기[* 당시 나가사키에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외국인의 체류가 인정된 인공섬 [[데지마]]가 있었다.]라 하였습니다.”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서울로 올려보내라고 명하였다. 전에 온 남만인(南蠻人) [[얀 야너스 벨테브레|박연]](朴燕)이라는 자가 보고 ‘과연 만인(蠻人)이다.’하였으므로 드디어 금려(禁旅: 여행이 금지된 곳. 한양)에 편입하였는데, 대개 그 사람들은 화포(火砲)를 잘 다루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에는 [[플룻|코로 퉁소를 부는]] 자도 있었고 발을 흔들며 춤추는 자도 있었다.[* 실제로 네덜란드의 전통 춤에는 [[https://www.youtube.com/watch?v=SNmpkeY41xA|스텝을 밟으며 발을 흔드는 춤]]의 종류가 많다.] > ---- > [[효종실록]] 11권 효종 4년(1653년) 8월 6일 무진 2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qa_10408006_002|링크]]] 제주도에 표류하게 된 하멜과 일행 38명은 권극중과 노정이 보낸 군대에 의해 잡히게 되었다. 처음에는 한양까지 불러와서 벼슬도 시켜주고 나름대로 잘 대해줬지만 하멜 일행중 두사람(생존 선원들 중 최선임자인 1등 항해사와 포술장이었다)이 청나라 사신의 행차에 뛰어들어 집으로 보내달라고 난동을 부리는 사건으로 그 둘은 죽임을 당하고 나머지 일행 전원의 목숨까지 위태로워졌다가 귀양으로 끝났다. 이후 이들은 전주, 남원, 순천, 여수 등에 분산배치되었다가, 여수 [[전라좌수영]]에 배치된 인원 전부와 순천에 배치된 일부가 일본으로의 탈주를 감행한다. 1666년으로 억류 13년 만이었다.[* 좌수영 뒷담을 넘어 인근 해안으로 도주한 다음, 미리 선창에 묶어 두었던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데 성공했다. 이들이 탈주한 해안은 현 여수시 종화동으로, [[거북선대교]]인근이다. 당시에는 이곳이 해안가였다.] 게다가 하멜이 13년동안 억류되어 있다가 탈출할 때까지 조선 조정은 그들이 [[남만]]인인 줄 알고있었다. 남만은 동이-서융-남만-북적, 중에서 남쪽 오랑캐, 즉 [[동남아시아|동남아]]쪽을 의미한다. 동남아를 거쳐오긴 했으니, 그냥 뭉뚱그려 남만이라 칭한 것. 즉, 그냥 이런 괴상하게 생긴 신기한 놈들 사는 어떤 동네. 그들도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이런 식으로 국가를 세웠다는 사실 자체는 아예 모르고[* 당시 남만, 즉 동남아는 아직도 부족사회가 많았다. 그리고 조선과 명나라를 제외한 여타 지역은 다 오랑캐라고 생각한 시대상도 반영된다.], 얘들은 남만인 중에서도 [[화란]][* 당시 네덜란드는 홀란드(Holland)라 불리웠다. 홀란드를 한자로 음차한 것이다. 현재도 많은 나라들이 네덜란드를 옛 이름인 홀란드라 칭한다. 현재 홀란드는 네덜란드내 지역명 중 하나이다.]인이라는 일본의 통보를 받고서야 '그런 나라도 있구나' 했다. 나중에 하멜을 심문했던 일본 측의 통보를 받고서야 네덜란드인인 줄 알았다고 한다. 일본 [[에도 막부]]는 하멜에게서 조선의 정세, 국제 관계, 나라 상황 등 국가현안뿐 아니라 문물, 풍습과 같은 부수적 분야를 포함한 총 54여개 항목에 대한 조사를 '''단 하루만에 진행'''하였고, 이를 무기로 조선을 외교적으로 압박했다.[* 당시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츠나]] 재위기 시절이다.] 이게 어떤 의미냐면 하멜 일행은 일본에 통보를 하고 정식으로 방문한 것이 아니라 조선에서 도망쳐 온 것이었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방문인 셈이다. 그럼에도 이들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를 단 하루만에 일목요연하게 끝냈다. 이는 이런 상황에 대비한 가이드 라인이나 정책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https://www.dogdrip.net/450179318|#]] [[https://www.hendrick-hamel.henny-savenije.pe.kr/hollandk9.htm|#]] >“우리는 매일 많은 고관들로부터 부름을 받았으며 그 이유는 그들과 부인들 그리고 아이들이 매우 신기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또 제주도 사람들이 우리 생김새가 사람보다는 괴물처럼 생겼다는 소문을 퍼뜨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우리가 무언가를 마실 때는 코를 귀 뒤에 돌린다는 말까지 있었다.” >------ >헨드릭 하멜 조선에서 신분을 가리지 않고 하멜 일행은 화젯거리였고, 너도나도 구경하러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건 당시 하멜 일행의 생김새가 사람이 아니라 괴물 같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인데, 조선인들은 하멜 일행의 생김새를 희화화하며 이야깃거리로 삼았다고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조선인에게 배척받는 존재였던 하멜 일행은 거의 유일하게 자신들에게 잘 대해주는 승려들과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출처 《역사저널 그날, 네덜란드 청년 하멜, 조선에 표류하다》 편] 승려들도 당시 조선 사회에서 배척받는 존재였다. 여담이지만 고향 말조차 거의 잊고 조정에서도 불려다닐 정도로 자리잡은 벨테브레이([[얀 야너스 벨테브레|박연]])와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거의 '신기한 생물' 수준의 구경거리가 되는 하멜 일행의 모습이 참 대조적이다. 헌데 박연은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여기 들어온 이상 나갈 생각 말아라.]]" 식으로 말하니... 사실 하멜 일행도 몇 번씩 탈출 시도를 하고 몇 번씩 또 실패하면서 탈출에 성공했다. 중국 사신이 오는 것을 알고 길막한 뒤 단체로 호소를 하거나, 아는 어부를 회유해 배를 구입하거나... 그렇다고 섣불리 일본으로 보내줄 수도 없는 것이 [[효종(조선)|효종]]은 북벌을 추진 중이었는데 당시 [[청나라]]는 조선에 대해 빠삭하게 꿰고 있었고 효종은 가뜩이나 약점이 잔뜩 잡힌 판국에 또 조선 사정을 알게 된 외국인이 들어왔으니 유용하게 부려먹을지언정 내보낼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정작 다른 왕 때 들어온 [[미국인]]들의 경우에는 그냥 청나라로 보내버렸다. 당시 기사를 보면 이들의 국적을 '미리견'으로 표현했는데, 이를 현대 표준중국어로 읽으면 '메이리젠(Měilìjiān)' 정도가 된다. ㄱ계 구개음화가 적용되지 않았다고 가정하면 '메이리곈'. '아메리칸'에서 '아'는 슈와, 이른바 약한 어 모음이므로 '메리칸' 정도로 들렸을 것이고 이게 '메이리곈'으로 음차된 것으로 추측. 게다가 당시 일본으로 인도한 [[청나라]] 사람, [[대만]] 사람, [[류큐 왕국|유구국]] 사람들이 기독교도라고 마구 참수되는 일이 적잖았고, '''심지어 유럽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들도 "너 배교할래 죽을래?"'''라는 선택을 받고 [[순교]]하거나 배교하던 시절이었다. 대표적으로 크리스토방 페헤이라(Cristóvão Ferreira)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632376&cid=50766&categoryId=50794|주세페 키아라(Giuseppe Chiara)]] 같은 경우가 있었으며, 이들은 배교후 일본이름을 쓰고 일본인으로 전향하여 [[카쿠레키리시탄]]의 색출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즉 그들이 첩자질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조선으로서는 쉽사리 내보내지 못한 것. 하멜 일행은 자신들이 모두 기리시단이라고 일본말로 진술한 바가 있어 조선에서는 얘들 보냈다간 다 죽는다면서 잡아두자고도 했다. 실제로 일본에 도착한 하멜 일행이 나카사키로 보내져 [[후미에]]를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칼뱅파 개신교를 중심으로 이미 본토에서 성상 파괴 운동이 진행되었던 네덜란드였으니 [[후미에]]를 하는 데에 거리낌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일본 측에서는 의심을 풀지 못하고 이들의 진술이 사실인지, 또 조선에서 종교 행위나 포교 활동을 했는지를 알아보고자 서신을 주고받는 통에 결국 일본 도착으로부터 1년이나 더 지나서야 겨우 고국행 출항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